한국 진보의 태동, 조봉암의 잊혀진 삶을 복원하다!사람다운 진보주의자 죽산 조봉암의 생애 『조봉암평전』. 평생 리얼리즘 소설을 써온 작가 이원규가 쓴 책으로, 조씨 문중 등에서 나온 미공개 사진자료를 비롯해 독립운동사와 공산주의 운동사 관련 자료를 풍부히 수록하고 있다. 일반 평전 형식과는 다르게...
평화와 정의의 씨를 뿌리고 간 순교자 | 저자의 말
제1부 출생과 청년시절, 그리고 죽음
1 죽음 앞에 의연한 거인
나는 씨를 뿌리고 간다 | 나라를 위해 옳은 일 하다 죽으니 행복 | 사형수의 마음 | “아버님의 목숨을 제발 살려주십시오” | 애타는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| 공적인 배신이자 사적인 배신 | 재심 신청 기각, 사형이 확정되다 | “선생님, 가시지요. 집행입니다” | “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나요!” | 조문도 받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니
2 출생과 성장
19세기 마지막 해에 강화 섬에서 태어나 | 강화 섬에 몰아닥친 풍운 | 말썽쟁이 소년, 조봉암 |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 사환으로 일하다 | 잠두교회에서 만난 운명의 소녀, 김이옥
3 3?1만세운동과 두 번의 투옥
강화 섬을 휩쓴 3?1만세운동의 열기 | 체포, 그리고 고문 |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다 | 김이옥, 조봉암에게 사랑을 느끼다 | 불안한 김이옥의 사랑 | 경성 YMCA에서의 생활 | 대동단사건으로 다시 취조당하다
4 일본 유학과 사상적 성장
일본 유학을 떠나다 | 평생의 동지, 김찬과의 첫 만남 | 김찬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들다 | “조국의 현실 속으로 뛰어들 때가 됐어!” | 국내 공산주의자들과의 만남 | 국내 공산주의 이론가로 급부상하다
5 공산당의 심장부 모스크바에 가다
러시아 국경을 넘는 국제열차 |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여운형을 만나다 | 베르흐네우딘스크 연합대회의 파행 | 부하린과 모스크바공산대학 | “죽어도 내 나라로 돌아가 싸우다 죽어야지” | 신사상연구회와 김찬 |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싸움 | 상하이 트로이카 |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하다 |
제2부 조국 해방의 탄환이 되다
6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다
신흥청년동맹의 순회강연 | 김조이와의 사랑 | 강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| 김조이와의 결혼, 그리고 기자생활 | “공산당 창당을 위하여! 조국 해방을 위하여! |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| 일경의 관심을 따돌리고 | 민중운동자대회 불허에 맞서 반대집회를 지휘 | ‘상하이의 조선인’ 여운형과의 재회 |
7 모스크바와 상하이
경찰의 눈 피해 정구 선수가 된 아우 | 아우 조용암,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르다 | 국내 조선공산당, 대규모 검거로 와해 위기 | 상하이에서의 활동 | 만주 땅에 공산주의 씨를 뿌리다 | 만주총국 세웠지만 3차 공산당서 밀려나 | 김이옥, 병든 몸으로 찾아오다 | 밀정에 쫓겨 김이옥과 한 몸이 되다
8 세 번째 투옥
시련 속의 외로운 투쟁 | 김이옥을 살리기 위해 모풀 공금에 손대다 | 이념과 사상 초월한 민족유일당운동에 나서 | 가난하고 위태로운 망명투사의 삶 | 후배 동지 양이섭과의 인연 | 1930년, 3?1절과 6?10기념일 맞아 시위 벌여 | 아내 김조이와의 뜻밖의 만남 | 동지들의 거센 비난 |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당하다 | 김이옥과의 동거로 공산주의투쟁 중심서 밀려
9 다시 감옥으로
신의주형무소로 끌려가다 | 김이옥의 죽음 | 길고 긴 감옥생활 | 일제, 사상범 전향 책략을 쓰기 시작 | 출소 후 인천에 자리 잡다 | 『매일신보』에 국방헌금 냈다는 기사가 실려 | 끊임없이 이어진 회유와 예비구금령 | 태평양전쟁으로 패배를 앞둔 일본의 발악
제3부 해방된 조국에서
10 해방공간에서
해방의 날 | 인천의 새 지도자로 떠오르는 조봉암 | 승전국 미국과 소련, 조선반도를 장악하다 | 박헌영 등 옛 동료로부터 계속되는 비난 | “해방이 됐지만 해방이 아니야” | 조선공산당에서 소외되고 인천에 묻혀 | 인민위원회와 한민당 간의 주도권 싸움 | 우익과의 대화 | 해방 후 첫 삼일절 | 김조이의 생각 | 박헌영에게 쓴 편지가 공개되고 전향하다 | 윤봉림과의 인연 | 공산주의보다 통일된 조국 건설이 더 중요
11 정치가의 길
인천의 정치 기반, 그리고 민주주의독립전선 | 좌우익 대립 정국에서 희망 주는 지도자로 | 딸 임정을 얻다 | 중간노선파 여운형, 백주의 서울서 암살당하다 | 남한만의 단독정부 지지, 총선거에 나서다 | 민족자주, 민족자존의 신념 | 민족청년단의 지지로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 | 국회 무소속구락부의 대표가 되다 |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다 | 장관 취임 후 뽑은 일꾼들 | 양곡매입법안 상정, 농민들의 지지로 통과 | 금의환향 | 농지개혁안을 밀어붙이다 | 유상몰수 유상분배,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절충 | 한껏 높아진 정치적 위상 | 51세에 아들을 얻다
제4부 영광과 굴레
12 대통령의 꿈
국회부의장으로 6?25동란을 맞다 | 국회 문서를 옮기느라 가족도 못 챙겨 | 아내 김조이,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 | 1?4후퇴시 제 가족보다 장택상 가족 먼저 돌봐 | 부산 임시수도에서 | 이승만 정권, 죽산의 신당 창당에 방해공작 | 미국과 유엔 요구에 못 이겨 발췌개헌안 통과에 앞장 | 국회부의장에 재당선 | 제2대 대통령 출마 | 목숨을 건 이승만과의 대결 | 충실한 선거참모, 윤길중과 김성주 | 죽산, 차점자로 패했지만 농민 지지 확인
13 책임정치.수탈 없는 경제.평화통일
「우리의 당면과업」 집필, 그리고 도정궁 칩거 | 서예와 영어로 보내는 세월 | 미국 측의 지속적인 관심 | 호헌동지회의 명암 | 보수진영과의 합류 구상이 물거품으로 | 진보당의 모태가 된 광릉회합 | 양이섭에게서 정치 후원금을 건네받다 | 책임정치, 수탈 없는 경제, 평화통일 공약 걸어 | 대선후보 신익희 서거로 이승만과의 단독대결 |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다
14 내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
진보당 창당, 혁신세력의 집결 | 『중앙정치』 창간, 「평화통일에의 길」 기고 |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 | 검거 선풍 전야의 불길한 예고 | 형사대가 덮치기 전 자진 출두하다 | 부당한 재판, 부끄러운 역사 | 양이섭의 후원금이 대남공작금으로 둔갑 |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심에서 징역 5년 형 | 2심에서 간첩행위 죄로 사형 선고 | 대법원 최종판결에서도 사형 언도받아
죽산조, 그 새의 나라는 어디인가 | 에필로그
주요 참고자료
죽산 조봉암 연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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